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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생들의 융복합
좋은 음악이란 무엇일까?
정답이 여러 가지 있을 수 있는 질문이고 하나의 정답에 갇힐 필요도 없는 질문이다. 그래도 굳이 아래부터 나열하자면,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듣는 사람이 그냥 좋다고 하는 음악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단순히 좋다는 걸 넘어 소름이 돋는다거나 눈물을 흘리게 만들거나 하는 음악이 좋은 음악일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앞의 두 조건을 만족하면서 대중성, 즉 엄청난 인기까지 얻은 음악일 것이다. 대중적 인기란 보편성이기도 하고 객관성이기도 하다. 아티스트가 어느 정도 재능도 갖추고 있어야 하고 운도 따라 주어야 대중성 있는 음악까지 도달할 수 있기에 마땅히 좋은 음악으로 칭찬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가인 필자가 좋아하는 음악은 무엇인가. 바로 회화적인 음악이다. 듣고 있으면 어떤 그림과 영상이 떠오르는 음악. 즉 영화음악으로서도 전혀 손색이 없는 음악이다. 밀란 쿤데라 같은 작가는 소설에 운율도 넣는다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소설이 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영화에서의 소리 역할일 것이다. 소설을 쓰고 있는 필자이지만 영화나 미술의 화려한 색채에 끌리는 것은 예술가로서 당연한 귀결이라 생각한다.
nuh의 음악이 그렇다. 한편의 그림과 같은 음악이 아닐 수 없다. 색채까지도 가끔 떠오르게 만든다. 겉으로 록 이라는 장르를 띄고 있지만 weeknd처럼 소음에 가까운 소리까지 음악으로 담아낸다. 그렇게 장르를 넘어섬과 동시에 음악에 색채를 입힌다.
첫 앨범 LIFE가 전형적인 색채의 음악이다. 아티스트의 탄생부터 라이프, 인생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그냥 주제도 방향도 색깔도 개성도 없는 군중들의 웅성거림으로 음악이 시작되지 않는가. 너무 절묘 하기 짝이 없는 묘사다. 곡도 전혀 무리하지 않고 아주 긍정적인 오픈 결말로 끝을 낸다. 그 또한 인생을 표현하기에 아주 적절한 방법이다. 수많은 미숙한 작가들이, 음악이든 문학이든 회화 든 상관없이, 사회를 비판하고 인생을 정의하기 위해 무거운 제목들을 가져다 붙이지만 그 내용은 실상 유치하고 판에 박힌 묘사나 공허한 절규로만 끝나기 일쑤다. Pink Floyd의 ‘Time’이 그렇다. 시간을 음악으로 서술하기 위해 굳이 초반에 시끄러운 괘종시계소리로 시간이라는 개념으로 직행하는 것은 사실 유치한 구성이다. 물론 위대한 곡이고 70년대 시도한 음악 치고는 대작 임이 분명하지만 수 백 년 전의 아티스트가 창조한 작품이 지금도 칭송 받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볼 때 무리한 비판은 아니라 생각한다.
어쨌든 만약 소설가인 내가 언젠가 영화감독이 될 수 있다면 nuh의 ‘LIFE’ 를 영화음악으로 정해놓고 음악에 맞춰 각본도 짜고 영화배우도 결정하는 역설적인 작업을 해보고 싶다.
그렇게 아티스트 nuh의 작품세계는 ‘rushour’ 를 거쳐 ‘night of miyazaki’ 에 도달한다. 직장 생활에 덫에 갇힌 아티스트의 감정, 돌파구를 찾으려는 몸부림을 ‘rushour’에서 느낄 수 있다. 그 강력한 반작용으로 아티스트는 안식처이자 더 높은 곳에 뛰어 오르기 위한 디딤돌이기도 한 미야자키에 도달한 것이다. 아티스트 nuh에게 있어서 미야자키가 인생의 전환점이라고까지 말 할 수야 없겠지만 상당히 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장소라는 점은 음악을 들으면 알 수 있다.
들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꼭 ‘night of miyazaki’ 를 꼭 들어보기 바란다. 회화성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곡일 뿐만 아니라 아주 넓은 의미의 모던 록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집어 넣은 곡이다. 그 정도 넓이와 파워를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작가의 미야자키에 대한 애착이 크다는 반증이다. 그리고 이 글의 주제인 nuh 2020을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곡이 ‘night of miyazaki’ 이기도 하다.
돌아 돌아 왔지만 이번 nuh의 신작을 이해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 nuh의 인생?과 미야자키를 언급하지 않고 어떻게 nuh 의 2020을 이해하겠는가!
예술가는 자기자신을 드러내고 또는 자기자신을 필터로 자기 주변의 인간세상을 드러내야 하는 존재다. 우리의 인생이 결론도 없고 방향도 없고 그저 힘들기만 하다고 느껴지지 않는가? 물론 누군가는 남의 모범이 될 정도로 착실하게 살아가며 엄청난 성과도 내겠지만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드라마 같은 반전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기계처럼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대미문의 코로나 사태를 맞아 그나마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감정을 충전하던 버릇마저 억눌러야 하는 인간의 신세 란...
이런 세상에 아티스트가 표현해야 할 것이 암울과 자포자기라고 해서 절대 비판해서는 안 된다. 세 번째 곡 ‘Same old’ 를 듣는 이, 바로 우리들의 마음이니까. 또한 두 번째 곡 ‘서울’도 있으니까. 필자는 개인적으로 ‘서울’을 들으며 미야자키를 느꼈다. 아티스트가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정착하며 느끼는 느낌은 절대로 암울과 자포자기가 아니다. 고향을 떠난 다는 것이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도 아니고 어쩌면 지금까지의 자기의 모든 것을 부정해야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티스트 nuh가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그곳이 미야자키의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코로나로 국경이 막혀버린 지금 더더욱 우리에게 ‘서울’은 필요한 음악이다. 마음의 안식처로. 특히나 필자처럼 조국까지 떠나, 먼 해외에 정착해 그곳을 제2의 고향이라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마지막, 첫 번째 곡 ‘하이웨이’. 이 곡은 아티스트 본인의 정의 대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들어야 하는 곡이다. 역설적으로 그런 때란 무언가를 반드시 돌파해야 할 때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하이웨이’는 ‘rushour ’의 재해석이라고 해도 될 법하다. 어떻게든 감정의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하는 ‘rushour’ 의 몸부림이 코로나 시대에 ‘하이웨이’를 통해 다시 느껴진다.
그리고 ‘하이웨이’의 중요한 점이 하나 더 있다. 2020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이지만 오히려 2020년, 100년 만에 있을까 말까 한 코로나 위기를 돌파해야 하는 내년을 맞아,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음악으로 더욱 좋은 곡이라는 점이다.
하이웨이처럼 어디에나 맞는, 언제든지 맞는, 편안한 가족이나 친구 같은 음악이 필요한 시기에 nuh 의 2020 탄생이 너무 절묘하다는 생각을 하며 끝을 맺는다.
모두들 행복한 크리스마스, 무언가 돌파하는 용기를 마련하는 새해가 되시길...
2020. 12. 20
소설가 켄